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테쿰세 셔먼 (문단 편집) === 남북전쟁 당시 === 이 때 셔먼의 연방 육군 재입대도 당시 미 의회 의원이었던 동생 존 셔먼의 입김이 작용했다. 당시 군에 대한 정치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그랜트 장군도 링컨 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에 해임 위기를 면하고 무사히 진급했다. 전쟁 초기에는 동부전역에서 1차 불 런 전투에 참전, 그랜트보다 먼저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승진 이후 서부전역의 [[켄터키 주]]에 배치되었지만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적군에 비해 전력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였고, 잠시 전장을 떠났다가 그랜트의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 공략전에서 보급을 맡아 그랜트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1862년 이후로 셔먼은 그랜트 휘하에서 [[샤일로 전투]], [[빅스버그 포위전]], 채터누가 전투 등 주요 전투들을 치렀으며 그랜트와 친분을 쌓고 그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랜트 휘하에서의 그는 전반적으로 전술적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지만 뛰어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랜트가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고 동부전역으로 이동한 후 셔먼은 그랜트와의 친분에 힘입어 서부전역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랜트가 리의 발목을 잡는 동안 셔먼이 남부를 휩쓴다는 대전략은 그랜트와 셔먼이 함께 마련했다고 여겨진다. 1864년 셔먼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조지아로 남하하지만 남군의 조셉 존스턴의 공간으로 시간을 버는 전략을 마주하게 되었고, 애틀랜타 근처까지 진격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전술적으로는 존스턴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존스턴도 셔먼이 애틀랜타 코앞까지 도달하면서 심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젊고 저돌적인 존 후드로 교체되었다. 후드는 셔먼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여러 적극적인 공세와 기만을 시도했지만 셔먼은 이에 넘어가지 않았고, 후드가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애틀랜타 함락 이후로도 후드는 테네시로부터 이어지는 셔먼의 보급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후드는 셔먼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테네시를 침공해 셔먼의 후방을 위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셔먼은 후드를 끝장내는 대신 조지 H. 토머스를 테네시로 파견해 후드를 상대하도록 한 후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는 '바다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방해를 받지 않게 된 셔먼은 마주치는 소규모 남군을 박살내며 보급을 현지조달, 조지아 주를 초토화시키며 대서양 연안의 서배너에 도달해 충분한 해상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랜트는 셔먼의 대군이 바다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와 포토맥군을 지원하기를 원했지만 셔먼은 대신 육상으로 북진,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노스 캐롤라이나를 초토화시키고 리의 후방을 위협했다. 이는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의 함락, 애퍼매톡스에서의 리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능력은 전략가에 치중되어 전술가로서의 능력만 따진다면 별로 보잘 것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싸우기 전에 이기는 조건을 조성, 확보해내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전장에서의 직접적인 싸움'에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순수한 전술가로서의 기량은 '치카마우가의 바위'로 불리는 조지 H. 토머스 쪽이 셔먼보다 더 유능하다고도 하는데, 그는 치카마우가에서 몇 번이고 전군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부대를 유지하여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고, 채터누가나 [[내슈빌 전투|내슈빌]]에서도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선보였다. 남부 육군에 워낙 뛰어난 전술가들이 많다보니 남북군을 통틀어 평가하자면 셔먼은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애틀랜타 전역에서의 상대였던 조셉 존스턴에게 어려움을 겪은 것을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조셉 존스턴은 유능한 장군이었고 로버트 E. 리보다 더 계급이 더 높았다.[* 조셉 존스턴은 웨스트 포인트 1829년 졸업생들중에서 최초로 별을 딴 인물로 로버트 리보다 최종 계급이 더 높았다. 즉, 훨씬 뒤에 졸업했고, 최종계급도 대위급이었던 "셔먼"은 존스턴에 비하면 그야말로 애송이였다.] 이런 존스턴의 뛰어난 방어진을 피하고 계속 전진한 셔먼이 유능한 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여기에 셔먼이 계속 불리한 교환비 결과를 냈다는 점에서 셔먼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으나, 셔먼은 어디까지나 '''적진'''에서 유리한 지형을 끼고 방어진을 치고 있는 적을 돌파한다고 생긴 어쩔 수 없는 피해였다. 조셉 존스턴조차도 야금야금 셔먼의 병력을 갉아 먹었으나 애틀랜타 코앞까지 와서 병력상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승부를 망설였을 정도로 셔먼의 진군은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략가적 능력, 특히 전략적 식견은 남북군 전체를 통틀어 어떤 장군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선진적이었다. 이는 1864년의 대결로 셔먼의 숙적 취급을 받는 조셉 존스턴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존스턴은 전략적 식견 측면에서 셔먼의 의도를 읽어낼 수는 있었고 실제로도 계속 우월한 교환비로 승리하여 1:3 정도 되던 남부 육군과 북부 육군의 비율을 거의 1:1.5까지 끌어내렸다. 그러나 셔먼은 계속 지면서도 꾸준히 [[애틀랜타]]까지 진격했고,[* 사실 이것만 봐도 셔먼이 전술적으로도 바보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불리한 교환비를 내면서도 어쨌든 목표로 삼은 지역을 점령하여 존스턴의 군대를 물러나게 했으므로.] 셔먼이 애틀랜타의 코 앞까지 진격하자 남부의 가장 중요한 지역중 하나인 조지아 주에서 계속 밀린다는 전황에 정치적 부담이 가중되어[* [[명령 제227호]]에도 있듯 전쟁중인 정치인에게 적국 군대가 자국 영토를 휘젓고 다니는걸 참고 견디는건 어마어마한 여론 압박이며 정치적 부담이다. 설사 어떻게든 막았어도 국민들의 원망을 피할 수 없을 정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남부연맹 정부는 존스턴을 해임했다. 존스턴은 지치고 규모가 줄어든 북부 육군을 애틀랜타 근처 유리한 지형에서 쳐부수려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예상보다 셔먼이 많은 병력을 온존하여 존스턴은 이 승부를 망설였다. 실제로 존스턴은 동부에서도 이렇게 이기고 있었는데도 계속 후퇴를 거듭하여, 남부 수도인 리치먼드 코앞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 애틀랜타를 무사히 함락시킨 이후 그의 전략은 더욱 빛을 발했는데, 후방에서 깔짝대던 후드를 쫓는 대신 토머스에게 병력을 맡겨 북부의 우월한 전력으로 후드를 [[내슈빌 전투|끝장내는]] 한편, 바다로의 진군으로 조지아 주를 박살내며 전쟁 수행 의지를 꺾고 보급선에서 자유롭게 기동하며 해상보급을 활용할 수 있었다. 항구에 도착한 이후에도 단순히 북부로 귀환하는 대신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를 휩쓸며 리의 후방을 압박하면서 남부군의 마지막 주전력인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항복시키고 전쟁을 끝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존스턴 해임 후 남부 정부는 좀 더 공격적인 성격의 후드 장군을 서부전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런 도박은 어찌 보면 남부로서는 근거가 있는 선택이었다. 이전에 동부에서도 존스턴이 전투에서 계속 이겼음에도 북부 육군이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 코앞까지 진격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 때 존스턴을 해임하고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의 [[로버트 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재미를 본 전적이 있었다.[* 다만 로버트 E. 리는 존스턴급 고참이었지만, 후드는 원래 용감하기만 하지 짬밥은 겨우 중대장급으로 나이도 비교적 어려서 경험도 전술적 실적도 매우 부족했다. 북이나 남이나 현장을 지휘했던 1선급 장군들은 로버트 E. 리나 존스턴같은 장성급 고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10~20년대 생들이었는데 후드는 30년대 생이었다.] 어쨌든 전임자였던 존스턴이 야금야금 북군을 갉아먹어놓은 것도 있고, 남부 육군이 애틀랜타를 지키기 위해서 주위에서 병력을 닥닥 긁어모은 것도 있어 후드는 더 우세한 병력으로 애틀랜타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나,[* 애틀랜타 전투에서는 5천명, 즉 15% 가량 더 많은 병력으로 셔먼을 상대했다. 단, 이 전투에서 상대한 것은 셔먼의 주력인 테네시군뿐이었고, 스코필드의 오하이오군과 토머스의 컴벌랜드군은 애틀랜타 포위를 위해 분산된 상태였기에 전체 전력은 연방군이 훨씬 우세했다.] 셔먼을 쫓아내기 위해서 무모한 공격을 계속 감행한 끝에 전술적, 전략적 양쪽 면에서 다 패했다. --어딜 가나 [[탁상행정|다 이긴 싸움 말아먹는건 높으신 분들 주특기]] 물론 북군 입장에선 땡큐였지만--[* 역전의 노장 존스턴이 원했던대로 셔먼의 휘하 병력을 많이 줄여 놨는데도 함부로 공격하지 않은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존스턴은 데이비스의 닥돌 명령을 거부하면서, 지구전을 끌고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리 장군이 동부전역에서 그랜트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급한 결과를 내야 하는 쪽은 셔먼이고, 급해진 그를 자연스럽게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